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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적 무드(mood)풍으로 ----------- 우리는 낭만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무도 이를 찾으려 하지는 않는다. 대량생산과 상업주의와 자동차와 스피드, 디지털, 컴퓨터문화가 이런 꿈을 사정없이 차단하고 있다. 낭만은 그래서 에덴의 꿈을 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낭만을 마치 흘러간 유행가나 싸구려 화장품의 이름쯤으로 여긴다. 낭만은 낭만주의시대에만 중요한 사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낙원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낭만은 아직도 우리들 예술가들의 지상과제이고 우리가 예술로부터 애타게 바라는 위대한 메시지가 된다. 박혜라의 작업에서 이상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가 바로 이 낭만의 주제를 밑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화가는 누가 무어라고 하든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 그리기의 밑바닥에 비가 있다고 말한다. 비는 낭만의 또 다른 대명사다. 비와 나와 자동차는 늘 함께 하면서 분노하고 박혜라의 그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와 나와 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비는 낭만의 또 다른 의미의 코드인데 그것은 자동차와 묶이어있기 때문이다. 즉 화가는 ‘나와 자동차’라고 말하고 있듯이 사실상 박혜라는 자동차와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말은 오늘의 우리 일상이 자동차와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화가는 ‘나와 자동차’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곧 자동차이고 자동차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박혜라의 현대적 자아(自我)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가 비를 끌어들이는 계기는 유행가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나와 비’가 아니라 자동차와 한 몸이 되어있는 나와 비와의 교감이고 그 반응이다. 단순히 ‘생각하는 내’가 비를 사유하는 형식이 아니고 자동차라는 스피드의 기계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내가 비를 통해 현실을 느낀다. 우리는 이 자아를 신체(身體)라고 다시 부른다. 현대인의 신체는 자동차와 스피드와 하나가 되어있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움직이는 것, 그 모두가 그렇게 달라진 조건에서 사는 신체의 몫이다. 박혜라의 그림은 바로 그 현대적인 신체가 절절하게 낭만을 갈망하고 있다는 정황을 보여주려 한다. 화가가 당당히 ‘나는 비를 그린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다. 비는 그에게 있어서 낭만을 의미하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화가에게 있어서 걷는 다리는 자동차의 바퀴이고 그의 손은 핸들이고 또 눈은 윈도우이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윈도우를 통해 밖(外景)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비오는 날’의 시리즈는 모두 윈도우라는 라는 그의 특별한 눈을 통해 밖을 읽은 그 반응이다. 현대인의 신체(身體)가 본 외경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오는 날의 그의 눈(윈도우)은 언제나 얼룩의 범벅으로 가득 찬다. 그 얼룩의 범벅은 스피드와 흔들림과 바람이 시시각각 만들어 내는 어쩌면 우연한 물리의 연출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시문명이 만들어낸 우리의 공간적인 혼탁함과도 다르지 않는 메타포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빛의 흔들림과 분열을 발견했던 인상주의 시대의 주제와 마차가지로 붙잡을 수 없는 어떤 대상의 실체이기도 하다. 빛도 흔들리며 빠르게 달린다. 박혜라의 윈도우에 나타나는 비도 흔들리고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흔들리며 달린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두 그 흔들림과 달리는 속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은 멈춰있지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실은 대상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내가 너를 보는 주인이 아니라 네가 나에게로 들어와 내가 보게되는 즉흥적인 사건이다. 이 때문에 그의 그림은 전적으로 인상에 의존한다. 인상은 죽은 것(停止)을 보는 경험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을 실감하는 경험이다. 자동차의 윈도우에는 비오는 거리가 원근법이 없이 엉겨 붙는다. 양쪽에 선 가로수와 꽃나무와 그리고 전선주, 그리고 윈도우로 뛰어들 것 같은 자동차들이 괴물처럼 다가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 풍경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비가 단순한 현대인의 고독을 대변하는 비유가 아니라 실은 낭만을 위한 세레나데가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름다운 우산의 색깔은 별다른 감흥을 일으킨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미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화가는 그의 노트에서 이렇게 써놓았다. 이제는 떠나야지, 아니 내일은 꼭 떠나야지 안개비가 그의 고독을 씻어주는 치료약이다. 낭만과 현대인의 정황을 드러낸 매우 적절한 비유인 것이다. 가슴속에 묻어둔 서러운 이야기들이 빗물처럼 반짝이듯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낭만이 절실하다는 메시지다. 그는 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비와 바람과 속도와 흔들림이 만들어내는 윈도우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한다. 그것은 마치 낭만주의나 인상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기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물도 입자로 분할되고 빛도 입자로 분할되면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연의 효과는 우리를 미묘한 감성이나 감각의 세계로 유인한다. 우리는 이를 인상적인 흔들림과 모호함이라고 말한다. 박혜라의 비 그림에서도 같은 효과를 본다. 그것은 반향음(反響音)이나 휘몰아치는 듯한 바람소리를 이용했던 멘델스존의 음악 같기도 하고 폭풍과 요동치는 파도와 그리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구름의 이미지를 이중초점(二重焦點)으로 그렸던 터-너의 화법을 연상하게 한다. 마침내 우리는 기본음을 부수어 음(音)자체를 흔들었던 드뷔시의 <안개>와 <비>를 보게 되지 않는가. 박혜라의 ‘비오는 날’에는 고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노란색과 흰색(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은 희망이고 비옷을 걸친 어린아이의 모습은 생명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박용숙 / 미술 평론가 |
